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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11:00 순국선열 이찬의공 추모제☞ 웃골산 선영(증평읍 남하2구 둔덕마을 윗산)주관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증평군분원(분원장 이상욱)
신경자 복덩이뉴스기자  |  sinnogoji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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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29  15:43:12  |  조회수 :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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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100주년 애국지사 이찬의공 추모제에
국민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일시 : 2019년 3월 31일(일) 11:00

◇ 장소 : 웃골산 선영(증평읍 남하2구 둔덕마을ㆍ증평민속체험박물관 윗산)

◇ 주관 : 전주이씨대동종약원증평군분원(분원장 이상욱)

   
◇증평군민신문 제24호 2013년 1월자 3쪽에 실린 증평군의 인물 독립운동가 이찬의 - 증평군민신문에서는 찬자를 삼수변 찬澯(맑을 찬)을 썼다.

찬의공 아버님(창/우)께서는 3형제(경의瓊儀·찬의瓚儀·영의瑛儀) 모두에게 전주이씨 뿌리(王)를 생각하라고 임금왕변을 붙여 이름을 만들었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찬瓚을 쓴다.

 

이찬의(李瓚儀) 애국장(1991)

- 3·1 운동 ♢ 충북 괴산 -
(독립기념관 자료실)

이 찬 의(李瓚儀) 1878. 7. 15 ~ 1919. 3. 31 이명 : 燦儀

   
 
충청북도 괴산(槐山)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청안(淸安) 장날을 기하여 김수백(金壽伯)·이태갑(李泰甲)·신강면(辛康勉)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3,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주재소와 우편소로 행진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점차 시위군중이 격렬해져서 우편소와 주재소 등을 습격·파괴하자, 이에 겁이 난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애석하게도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3卷, 國家報勳處, 1987年, p.100.註・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72面・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3卷 59面

   

♥비문(碑文)

공(公)은 전주이씨(全州李氏) 효령대군(孝寧大君) 15대손(十五代孫) 창우(昌宇)의 아들로 서기(西紀) 1878년 7월 15일 괴산군(槐山郡) 증평읍(曾坪邑) 둔덕리(屯德里)에서 출생(出生)하시었다.

천품(天稟)이 너그럽고 의협심(義俠心)이 강하며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하신 공(公)은 인근에 널리 알려진 칠척장사(七尺壯士)로 평소(平素)에 이르시기를 마혁과시(馬革裹屍)함이 남아(男兒)의 길이라 주창(主唱)하셨으니 지순지결(至純至潔)하신 고조(高操)는 가히 대장부(大丈夫)의 표상(表象)이라 하겠다.

이렇듯 남달리 기개(氣槪)가 높으신 공(公)은 경술국치(庚戌國恥) 이래 이 땅에서 육량(陸梁)하는 왜구(倭寇)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시다가 기미년(己未年) 3월 마침내 내어 뿜는 민족적(民族的) 망릉(芒稜)으로 혈풍혈우(血風血雨)가 전국토(全國土)를 휩쓸자 3월 30일 청안(淸安)장날 이태갑(李泰甲) 등과 기고(旗鼓)를 함께 잡고 수 천명의 동지(同志)를 규합하여 항적필사(抗敵必死)의 정신(精神)으로 군중(群衆)의 선두(先頭)에서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부르시며 주재소(駐在所) 우편소(郵便所)를 습격(襲擊) 투석전(投石戰)을 벌이셨던 바 선봉장(先鋒將)이신 공(公)은 긴급출동(緊急出動)한 왜헌병(倭憲兵)들의 흉탄(兇彈)에 쓰러지시고 군중(群衆)도 해산(解散)되니 공(公)의 구국충정(救國忠情)과 대지(大志)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향년(享年) 39세에 냉산(冷山)의 혼(魂)이 되고 말았도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생각할수록 유몌(濡袂)의 누(淚)를 자아내도다.

이제 수 많은 성상(星霜)이 바뀌어 공(公)의 열혈(熱血)은 찾을 길이 없으나 공(公)의 천읍지애(天泣地哀)할 거적(巨迹)은 천추(千秋)에 길이 빛날 것이며 웅맹탁특(雄猛卓特)하신 용개(勇槪)는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귀감(龜鑑)이 되리라.

   

♥애국지사 이찬의공 비석 : 순국선열이찬의지묘(殉國先烈李瓚儀之墓) 배부인안동김씨부좌(配夫人安東金氏祔左) - 배부인안동김씨부좌는 합장한 부인 안동 김씨(김/노/동)께서 찬의공 왼편에 묻혀 계시다는 이야기

애국지사(愛國志士) 이찬의공(李瓚儀公) 이야기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 노산 이은상

애국지사(愛國志士) 이찬의(李瓚儀) 공(公)은 1919년 3월 30일(음.2.29) 청안 장터에서 항일만세시위를 벌이다 일본 헌병의 흉탄을 맞고 순국했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집안나이)

둔덕마을에는 부인 안동 김씨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3살박이 아들 기영이 있었다.

찬의공은 전주이씨 집성촌인 둔덕마을(증평읍 남하2구)에서 1878년 7월 15일(호적상) 이창우의 삼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칠척장신에 힘이 장사였다.

마을 어르신들에 따르면 논에 물을 대는 수멍을 돌로 막아 만드는데, 묘지 앞에 있는 비석만한 돌을 번쩍 들어 놓아 마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깃대 뺏기 마을 간 시합을 하면 찬의공께서 깃대를 잡았는데, 기를 뺏으러 오는 상대 마을 사람을 한 손으로 집어 던졌다.

그는 천하장사였지만 형제간 우애도 무척 깊었다.

아버지가 웃골산을 3등분하여 산 아래는 큰 아들, 가운데는 둘째 아들, 산 위는 셋째 아들이 땔감을 하게 했다.

그런데 힘이 센 공이 몸이 약한 동생과 바꾸어 산의 맨 위 부분을 차지해 땔감을 했다고 한다.

애국심 또한 남달라 항상 '나라를 위해 전장(戰場)에서 죽는 것이 가장 값진 삶이고 마땅한 일이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시작된 삼일운동의 물결이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던 때 괴산에서도 뜻있는 사람들이 거사를 준비했다.

벽초 홍명희 선생은 1919년 3월 17일 - 18일 괴산 인산리 자택에서 스스로 조선 독립 계획을 고취하는 선언서를 집필하여 숙부 홍용식, 홍태식 그리고 아우 홍성희 선생과 더불어 3월 19일 괴산 장날에 충북 지방에서는 최초로 만세 시위를 펼쳤다.

   

청주 삼일공원 항일운동기념탑

 

홍명희 선생 등 20명이 검거되자 그 아우 홍성희 선생은 3월 24일 장날을 기해 다시 대규모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그런 항일시위 소식은 평소 남다른 애국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공(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공(公)의 부인(1951년 작고)에 따르면 1919년 3월 30일, 청안장날을 맞아 공이 깨를 팔러 장에 간다고 나가는데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뭔가 굳은 결의가 있었다고 한다.

공(公)은 깨자루에 태극기를 넣어가지고 길을 떠났는데 아마 작심(作心)하고 길을 떠났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청안 항일시위는 군중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고 밤새 투석전이 벌어졌는데, 청안주재소에서 진압할 수가 없어 청주 본서 등지에서 일본헌병이 파견돼 진압했다. 헌병주재소를 부수는데 일제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이 때 천하장사 찬의공은 현청에 있는 큰 돌을 번쩍 들어 주재소를 박살냈다.

당시 시위참가자들에 따르면 그 돌은 성인 남자 3명이서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선두에서 맹렬하게 투석전을 벌리는 공(公)은 당연히 일본헌병의 표적이 되어 일제의 흉탄에 쓰러졌다.

부인께서는 아침까지도 건장했던 남편이 흉탄에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들에게 무슨 해가 미칠까 아기만 부둥켜 안고 현장에도 못갔다고 한다.

당시 일본헌병이 쏜 흉탄에 맞아 돌아가신 분이 6명이였고, 다친 사람은 말도 못하게 많았다.

둔덕마을 집안사람들이 찬의공 시신을 찾으러 청안에 갔는데, 분위기가 무척 살벌해 한밤중에 관청에 들어갔다. 관청에 가보니 돌아가신 분 6명을 거적으로 씌워놨는데, 체격이 남달리 컸던 찬의공은 발이 쑥 나와 있어서 바로 찾을 수가 있었다 한다.

집안사람들은 묘를 종산(宗山)인 웃골산 와암골(왁박골)에 썼다.

공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고 그리고 1986년 보훈청에서 묘역정비사업비가 나와 웃골산 성주사터 아래로 이장(移葬)을 했다.

김정자 장손자 며느리(전주이씨증평분원부녀이사ㆍ복덩이뉴스 사장)는 “공의 비문에 '오호 통재라'하는 말이 있다.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 비문을 만들 때 ‘오호 통재라’는 말을 넣었다. 나는 웃골산을 찾을 때마다 웃골산에 계신 그 분의 정신을 느끼려 한다. 그 정신은 푸르디 푸른 절개, 애국혼, 헌신과 열정 같은 것일 것이다. 나는 그 정신을 '웃골산 청년정신(靑年精神)'이라고 부른다. 나는 자식들에게 늘 ‘웃골산 청년정신’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내 남편(이강규)도 자식들에게 할아버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할아버지를 늘 영광으로 생각했다. 찬의공 손자라는 사실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다. 남편은 ‘잘 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 아니라 '잘 되면 할아버지 덕, 못 되면 내 탓'이라고 늘 말했다.”면서 ..

“애국자로 살아도 한 생을 사는 것이고 매국노 짓을 해도 한 생을 사는 것이다. 그렇지만 단 한순간을 살아도 남을 위해 살겠다는 각오가 있는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법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정자 여사는 자식들에게 청안동헌에 있는 만세운동유적비를 자주 찾아가 고난을 함께 했던 김수백(金壽伯)·이태갑(李泰甲)·신강면(辛康勉) 선생 등을 기억하고, 독립유공자 후손답게 열심히 살라고 교육했다고 말했다.

   
 ◇둔덕마을 입구에 있는 찬의공 묘 안내표지판
   
 ◇찬의공이 태어나신 둔덕마을은 태극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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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안만세운동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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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이찬의공
(건국훈장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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